"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mourn forever"
We contemplate Christ’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during the Lenten and Easter season. Some might remember and deeply commemorate Jesus’s death on the cross, while others focus more on the resurrection. I would say that people generally weigh more on “life” that overcomes the power of death. However, it is not easy to be grateful for “life” and celebrate it because we witness the sadness, darkness, and death of those who spend time in concern, pain, and sorrow rather than life and joy. The world is experiencing the power of death and various forms of destructive power, such as racism, war, violence, oppression, ignorance, schism, poverty, disease, and so on. By witnessing the power of death, how do we celebrate “life” and declare “joy” delivered by resurrection? It’s been a tough homework assignment for me. While struggling with this context, I read "the Beatitudes", a poem by Korean poet Dong-ju Yoo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They shall mourn forever.
This poem is a parody of the Beatitudes in Matthew 5. Eight different types of people appear in the original biblical text. Yet the poet Yun narrates them all as “those who mourn.” Additionally, Yun made another critical modification. Matthew says,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However, Yun modified the last part to say, “They shall mourn forever.”
Some readers understand this poem as a sarcastic or cynical view of human life. However, Yun’s intention is neither sarcastic nor cynical. The poet must have been a person who could not easily tell those who mourn, “you would be comforted.” Yun seemed to think such a declaration was an easy, shallow, and meaningless consolation. Instead, Yun would have expressed his determination to be with those who mourn by declaring, “they shall mourn forever.” Indeed, confronting mourning, not avoiding it, was true faith for Yun. The apostle Paul says, “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mourn with those who mourn,” in Romans 12:15. I believe this is the core of Jesus’ teaching and his ministry, and this is what the poet Yun wanted to manifest through his poem.
What kind of life should I wish for, facing various forms of death that appear in the world? As a Disciple and a Pastor, I once again decide to live a life of mourning together rather than delivering meaningless consolation as cheap grace. I want to face the power of death boldly by mourning and sharing pain and sorrow so that the sadness and pain do not repeat.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사순절기와 부활절기는 죽음과 생명에 대해 묵상하는 기간인데, 일반적으로 ‘죽음’보다는 죽음을 극복한 ‘생명’에 무게가 더 쏠린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명에 감사하고 생명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선포하기가 쉽지 않다. 생명과 기쁨 보다 염려와 고통의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의 슬픔이 나에게 더 가깝게 와닿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다양한 모습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시기에 부활이 전해주는 생명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것일까? 나에겐 참 어려운 숙제와 같다. 그러던 중에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윤동주 시인이 쓴 ‘팔복’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가르침 중 여덟 가지 복에 관한 선언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팔복 선언에는 여덟 부류의 각기 다른 사람이 등장하는데, 윤동주는 이들을 모두 슬퍼하는 자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성서 본문에서는 “슬퍼하는 자는 (애통하는 자)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 선언하고 있는데, 이 선언을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바꾸었다는 점이 의아했다. 어떤 이는 이 시가 예수님의 팔복 말씀을 비꼬거나 또는 인간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의 의도는 비꼬는 것도 아니고 냉소도 아니다. 윤동주 시인은 슬퍼하는 자들에게 당신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시인은 그러한 선언을 쉽고 얄팍한 위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대의 깊은 슬픔을 마주했던 시인은 얄팍한 위로보다 몸으로 슬픔에 맞서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슬픔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정면으로 부닥치는 신앙을 윤동주가 깨달은 것은 아닐까.
윤동주는 영원히 슬플 것이라는 표현으로 자신도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겠다는 선언을 했던 것 같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라는 로마서 12장의 말씀이 있다. 나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성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마주하며 우리는 어떤 생명을 소망해야 할까?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얄팍한 위로나 값싼 은혜의 설교보다는 슬픔을 벗하며 함께 울고, 기쁨을 벗하며 함께 웃는 삶을 함께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한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수많은 생명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깊이 슬퍼하고, 더 많이 아파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슬픔과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죽음의 힘에 정면으로 부닥치는 삶을 살아 가겠다고, 그렇게 생명을 나누겠다고 다짐한다.
Rev. Baek Hee Kim was born in Seoul, Korea and came to the United States to study the postcolonial interpretation of biblical texts. He now serves as the Pastor of Bethel Christian Church in Indianapolis, IN and as the Communication Coordinator for North American Pacific/Asian Disciples (NAPAD). His ministry focuses on fostering Asian/Korean cultural awareness and making a pro-reconciling community.
한국의 서울에서 태어난 김백희 목사는 미국 유학을 통해 탈식민주의 성서 해석에 관해 공부하였고, 지금은 베델 크리스천교회 목사와 네이패드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김백희 목사는 한국과 아시아 문화를 알리며 화해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관심을 갖고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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